돈을 주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걷는 것을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거리를 지나며 스친 사람들의 얼굴을 단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갑을 주운 적은 몇 번 있다. 일부러 시간 내고 차비 내어 돌려주면 가지고 쌩 가기 일쑤였다. 드라마나 소설, 웹툰에서 나오는 인간관계 따윈 없었다. 오히려 만나서 돈을 확인하고 가버리고. 혹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그 2번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그 뒤로 사람 만나는 것이 더 싫었고, 난 지갑을 주우면 우체통에 넣었다.

 

정확히는 2020년 중순부터다. 난 아예 땅을 보고 걷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 내가 증오할 만큼 가족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만나러 다녔었다. 2020년부터 40이었는데 마흔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연속된 시간을 마음대로 분절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사람이라.

 

그러나 38~40까지 만난 수많은 사기꾼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나쁜 사람이 되는 시스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시스템에서 호의호식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면 욕을 한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정작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나는 늘 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특전사를 지원한 이후 맞고 있는 어머니를 보호하려 했을 때 방으로 가서 폭력을 지속하며 방문을 잠가버린 방문을 내가 발차기로 부쉈을 때 칼을 들고 오는 아버지를 보며. 아... 어른도 정말 별 것 없구나 라는 정신적 자유를 얻었고. 차마 사람은 찌르지 못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며 라이터로 불 붙이며 가오 잡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결국, 시간이 꽤 흘러 아버지 발소리만 들어도 개처럼 식탁 밑에 숨던 어머니가 집에 불을 지르셨고 까맣게 타버린 집에서 난 홀로 남아 너무 추워 드라이기를 틀어놓고 겨울을 보냈다. 간간히 찾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린 듯한 모습을 보았고. 서로 죽이지도 못하고 자살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특전사는 내가 면접 때 가지 않아서 떨어졌는데 그때 담당했던 사람이 나 나올 때까지 돌리라고 했다며 3일까지 돌렸던 사람이 나를 질타하며 왜 내가 논산에서 2명 정도 뽑혀 가는 특전사로 뽑혀갔는지 내막도 알게 되었다. 믓튼, 난 어머니가 그 뒤로 만나는 수많은 길거리의 조폭, 깡패, 양아치 들을 만나고 또 싸우며 비록 병이지만 공수 훈련도 받고 정기 낙하도 하고 대대 대항 산악 달라기 주자로 자존심 지키며 선임을 때리고 영창 안 갈 정도로 나름의 정의를 지키며 살아왔기에 공수부대 출신이 무색하지 않게끔 군 미필 남자들에게는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어머니께 회유책과 강경책을 다 섰고, 팔 한쪽에는 강경책을 쓸 때 커다란 상처가 남아 아이가 가끔 물어본다. 깡패라도 어머니와 잘 지내라는 당부를 했지만 폭력을 쓰는 놈들 때문에 군용 나이프를 들고 싸워야 했던. 그 조폭 중 한 명은 나랑은 아니지만 다른 파와 싸우다가 결국 죽었다. 그놈이 삼성전자 정문까지 와서 협박하길래 참 우습기도 했는데 어머니께서 하는 아들 자랑은 나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사실이었다.

 

땅을 보고 걷지 않게 된 이유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이다.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이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매우 높은 자리에 가지는 못하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열심히 해 준 사람. 그리고 그 사람 덕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도 프로젝트 지연 사유에 대해 그 프리랜서가 없다고, 그 프리가 실력이 없어서 그랬다는 식의 말을 하며 기생충처럼 회사에 붙어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을 옹호하며 사는 사람. 이렇게 작은 것 하나만 봐도 얼마든지. 위안부 할머니께 피해를 줄 위치에 가면 그런 선택을 할 사람 무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친구들, 지인들이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랬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모두가 그랬다. 넌 결혼 안 할 줄 알았다고. 그렇다. 이런 가정사 덕분에 난 정말 내 식대로 살았다. 삼성전자 시절에도 인사과랑 술 마시다가 여자 친구가 왔는데 여자 친구가 계약직 행정 사원이었기 때문에 인사과에서 무시하는 투로 이야기를 했는데 술자리에서 바로 주먹을 날렸다. 물론, 나에게 피해는 없었고 난 삼성 재직 시절 7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위 고과를 받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삼성 재직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사람을 대기업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말도 들었다. 아니, 대기업은 실력 없는 사람을 싫어하지 불우한 가정사와는 관련 없다. 다른 사람들과 이유 없이 싸우고 커뮤니케이션이 안 될 사람이라면 그런 가정사와 연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일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 상사 욕하는 문화 고친 일은 내가 한 일이다. 파급력이 없어서 책 발간까지 하고 나니 미디어에서 관심을 보여서 더 큰 파급력을 가지게 되어 삼성 정관 로비를 로펌에게 이관시킨 일 등은 최경영 기자, 최승호 기자가가 한 일이다. 대기자들(MBC 사장님에 KBS 본인 이름의 프로까지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에게 소스를 제공하는 법은 간단하다. 그냥 말이 안 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익성이 좀 있어야 한다. 본인이 개인적으로 당한 일이고 그 안에서 그칠 만한 일이라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수많은 개인적인 작은 불이익을 받았지만 나 혼자서도 해결할 만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에는 사회 구조도 바뀌어야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결국엔 인천 라면 형제가 라면을 안 끓였다고 하지만 계속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도 아이를 마음 놓고 키울만한 시스템이 바뀌기 전까지는 회자되어야 하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컵라면 먹으면서 지하철 보수 공사를 했던 청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을 바꾸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옛날 마을에서는 더 했다고. 개소리다. 옛날 마을에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문화 인식과 유통구조 변경이 있어야 할 텐데. 돈 벌면 서울 가라고 하고 데모하지 말라고 하고 학벌 라인 타서 성공하면 그냥 그 안에서 입 닫고 살아야 한다고 교육했던 사람들이 할 소리가 아니다.

 

내가 땅을 보고 걷지 않게 된 이유는 마흔이 되니 사람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좋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 마시다가 나에게 연락 주는 사람은 좋다. 그러나 미리 연락을 주어야 한다. 술 마시다가 연락을 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좋은 사람이고 호구로 보인다는 증거다.

 

그중 한 명은 삼성 계열사를 밝히긴 힘들지만 뉴스에도 났었던 친구다. 술 마시면서 납치당한 이야기 등도 해 주어서 최 기자님께 연결시켜 주려고 했는데 정작 대기자님과 연결이 되고 나니 구라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똑같이 술자리에 항상 불러서 자기 실력 자랑하는 개발자는 본인이 정말 가지고 싶어 하는 모바일 소스를 제공해 줄 업체(대기업)와 연계해 줘서 일을 줘 버렸다. 대기업 소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본인이 몰라서 블러핑을 했고, 본인에게 일이 주어질지도 몰랐다. 결국 그 형은 소스 받고 일 못하겠다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마 한 달 동안 분석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누구처럼 핵심 기능을 가져와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말 안 하고 피해받아 보라며 숨긴 것 없다. 내가 아는 부분 다 말해 줬다. 그러나 소스 수정은 정말 한 달도 쉬지 않았던 개발자만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내가 피해 본 사실은 없다. 국대 유명 대학(카이스트, 서울대 중 하나)과 연계가 있어 오히려 못 고칠 것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내 입지만 더 좋아지는 결과만 낳았다. 아마 이 글을 보면 그동안 연락 못하다가 다시 연락할 수 도 있겠다.

 

단순 개발자 아니다. 기획자 중에서도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어서 국가정책을 정하는 분들을 소개해주니 또 조용해졌다.

 

이 뿐이랴? 그나마 국내 및 해외(스탠포트, MIT,... 하버드는 아직 없네)의 수많은 사기꾼뿐 아니라 정말 어쭙잖은 사기꾼을 수 없이 만난다.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대학생 때까지 여자로 불릴 정도로 곱상한 외모를 주셨는지 늘 한탄했다. 왜소했다. 특전사 경험 때문에 지금은 오버사이즈를 사야 어깨가 맞는 몸을 가지게 되었지만 늘 그게 싫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IT는 거의 광화문, 혹은 강남을 다니니 길을 가면 꼭 하루 2번 이상은 나를 세우고 길을 물어본다. 물론, 신천지도 있었지만 그만큼 만만하게 보이는 비주얼로 수많은 사기꾼을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명확하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자유가 있다.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진심을 알 수 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정확히는 눈과 함께 표정을 보면 된다. 그리고 진정 진심을 알려면 본인이 아는 사람들을 조금은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의 진심을 알기에 어머니 같은 분과 같이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런 어머니는 나에게는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정성을 다해 키워준 것조차 다 된 밥이고 내가 밥을 했으니 밥에 똥을 넣어도 된다는 식의. 지금은 전화만 해도 늘 미안해하시는데. 사실 내 마음은 너무도 지쳐서 별 감흥은 없다. 용서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버리면 껍데기만 남아서 상투적으로 그 사람이 걱정된다 뿐이니. 진정한 용서는 내가 해주고 싶어도 힘들 정도로 지치게 된다.

 

 아니면 살아 보니 너무도 개판인 세상이라 처음부터 어머니께서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정이 이렇다 보니 이렇게 좋은 시대에 친구 집 살이를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이시다. 최근 생신 때 샤넬 넘버 5를 사 드렸는데 울먹이셨다. 나는 최고로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늘 나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셨던 분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연락 한 번 하는 것임을 알고 나서 삶은 그냥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자주 연락하고 사는 것이구나 하고 있다.

 

땅을 보지 않는 것으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러나 아주 장기간의 폭력(가정 폭력이던 왕따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땅을 보고 걷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정 폭력 피해자 70% 이상이 똑같이 그런 폭력을 쓴다는 연구 결과만큼이나 충격이었다.

 

번개탄 한 박스를 사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년 유지했다. 70%가 그렇다면 나 역시 그럴 것이고 그때는 알려진 자살 방법 중 가장 깔끔하게 가는 방법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텐트와 화로, 녹색 테이프, 번개탄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치웠다. 정확히는 장인어른 생선 굽는데 쓰시라고 드렸다. 왜냐면 아이가 10살이기 때문이다. 보험사는 연합해서 자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광고를 하고 정부를 설득하고 자살 방지 캠페인에 돈을 쓰기 때문에 믿음이 안 가기 때문이다.

 

늘 죽을 각오로 사는 것은 사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아직 못한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아마 지인들도 모르는 이야기도 많을 테니 지인들도 앞으로 할 개인적 이야기는 재미있게 지켜보길 바란다.

'{Infra} Server Set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껍데기만 남은 정의와 IT  (0) 2021.02.22
카카오 직원 자살 헤프닝  (0) 2021.02.22
지워질 생각  (0) 2021.02.15
언론, 신념  (0) 2021.01.29
IT계의 큰 바람. 몰입, FLOW  (0) 2021.01.26

+ Recent posts